JUNGNANG CULTURAL CENTER중랑구 소개

중랑의 뿌리

중랑천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신북리 북쪽 계곡에서부터 시작되어 남쪽으로 흐르면서 의정부시의 광쟁이 개울과 백석천(白石川)을 합치고 서원천(書院川)을 합한 물줄기는 다시 도봉구에 와서 한천(漢川)과 당현천(堂峴川)을 이룬 후 바야흐로 상봉동과 면목동에 이른다.


이렇듯 우리에게 익숙한 하천의 지류들을 포함 총 18개의 지류를 갖고 있는 중랑천을 성수동과 금호동의 경계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그 길이가 자그마치 45.3km나 되는 하천으로서 서울의 그 어느 하천보다도 길다. 현재 중랑천(中浪川)이라 부르고 있는 명칭 외에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송계천(속계), 중량포(中梁浦, 中良浦), 충량포(忠良浦)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먼저 송계천(松溪川)이라는 명칭은 냇물 동쪽에 송계원(松溪院)이 있는데서 연유되었음을 왕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종실록의「조선 태종 9년 5월에 태조의 제사를 올리기 위해 건원릉에 나가려 홍인문 밖에 이르렀을 때 앞선 신하가 살피고 돌아와 "송계원 서쪽천의 물이 넘쳐 건널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는 것과,「세종 2년 4월에 상왕(태종)이 철원 등지로 행차하려는 도중 송계원평에서 말을 멈추었다」라는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이로써 송계라는 중랑천의 옛 이름은 그 역사적 유래가 조선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한편 중량천이나 충량포라는 이름들은 하천의 형세가 넓은 물가를 이루고 있는 특성에 따라 붙여진 이름들로 보여진다. 이들 모두는 일정한 표기를 갖고 있진 않으나 왕조실록과 동국여지비고, 대동지지 등의 기록에서 표기만 다를뿐 음이 비슷한 명칭으로 나타나고 그 위치도 동일한 지점이어서 송계나 속계, 중량포나 충량포는 다같이 중랑천을 일컬었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시조 태조가 자신의 묘자리를 건원릉이라 칭하고 후손들도 장차 그곳을 장지로 삼으라 일렀다. 이에 5대 문종의 현릉에서 18대 현종의 경릉에 이르기까지 9개의 능을 이룬 게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이 되었다. 이 동구릉을 참배한다는 명분으로 효종은 중랑천 부근의 넓은 모래사장에 자주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것은 병자호란 후 효종이 봉림대군이었을 시절에, 형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8년간이나 볼모로 잡혀 있었던 그 굴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을 세우고 군을 정비하면서 북벌군의 군사훈련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역사적 사연이 서려있는 울분을 풀기위한 곳으로도 이용되었던 중랑천에 얽힌 뒷 얘기는 이외에도 많다. 동구릉이나 사릉, 광릉 등이 있어 역대 왕들의 능행이 잦았는데 이를 위해 특별히 석교를 놓았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시 송계교의 석재를 헐어 사용하는 바람에 고종 이후엔 능행길이 바뀌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강원도 방면으로 나가는데 있어 교통연결에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중랑교는 1934년에 가설된 것이지만 다리가 놓여진 것은 조선 초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러한 중랑천을 둘러싼 풍취가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온다. "여름 밭두둑에 바람 잔잔하니 밀 이삭이 잘 자라고 가을 들판에 비가 흡족하니 배꽃이 향기롭습니다. 오늘의 한번 노는 일 농꾼들도 기뻐하는 것이 시월의 타작마당은 풍년이 틀림없습니다. 「夏 龍同로徵麥穗場(하룡동징맥수장) 秋郊雨足稻花香(추교우족도화향) 一遊正合三豊望(일유정합삼풍망) 準擬豊登十月場(준의풍등십월장)」 이는 당시 세종과 상왕이 송계 언덕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중량포에서 점심을 들며 마련한 술자리에서 병조참의 윤회(尹淮)가 지은 것으로 상왕이 흡족케 했다는 7언절구시이다. 이런 기록이나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중량천(中梁川)의 표기로 보아 옛날 우리 중랑천변은 대단히 넓은 들판으로 한가롭고 풍광좋은 농경지대였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의 중랑천은 시꺼멓게 썩어 들어가고 물고기들이 사라져 하천 오염이 심각하였으나, 그동안 꾸준하게 중랑천을 살리기 위해 분류하수관거공사, 하수처리장 건설, 무단 방류업체 단속, 시민들의 환경의식 및 정화 활동에 힘입어 중랑천이 살아나고 있다. 건원릉에 모신 태조의 능참배를 위해 태종이 수시로 행차하였는데 후대의 왕들도 자주 능행을 하면서 지금의 월릉교 밑에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송계교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고 이에 따라 자주 보수를 하게 되었다. 송계교를 목교에서 석교로 개축할 때 인근 마을의 장정은 모두 부역으로 동원되었다. 부역자 중 중이(仲伊)라는 사람은 눈이 먼데다가 열여섯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였다. 국가의 명이라 부역을 거역할 수도 없는 처지고 양주 관아에서 이미 수차례나 인원 점검을 해왔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그의 딸은 자신이 아버지 대신 부역을 하겠노라며 양주 관아를 찾았으나, 처녀의 몸으로 돌 나르는 일을 할 수 없다하여 관아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중이의 딸은 관아 앞에서 여러날을 지새며 아버지 대신 부역시켜 줄 것을 간청하자, 관아로부터 드디어 부역 허가가 떨어졌는데 반드시 남장을 해야 한는 조건이었다. 그녀는 관아에서 시키는 대로 남장을 하고 참여했지만 문제는 생리현상이었다. 동료들과 일하다가도 배변시는 앉아서 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배뇨시에는 남자들과 달리 앉아서 해야 하므로 금방 여자임이 탄로날 지경이었다.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대나무를 잘라서 옷 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한한 수분섭취를 줄여서 배뇨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하였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양주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시킴으로써 중이를 대신해서 부역하던 그녀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자인 줄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그가 사실은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그녀를 중랑(仲狼)이라고 불렀고, 중랑(中浪)의 어원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봉화산은 중량구 목동.신내동.상봉동에 접하여 있고 정상까지 높이는 160.1m로 평지에 돌출되어 있는 독립 구릉이다. 동쪽에 아차산 주 능성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 북쪽으로 불암산 . 도봉산과 양주 일대까지 잘 조망되며, 서쪽과 남쪽으로도 높은 산이 없어 남산과 한강 이남 지역도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이다. 봉화산은 일명 '봉우제'라고 불리는데, 1963년 1월 1일부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서 서울시에 편입되었다. 봉화산이라는 이름에서 봉화와 관련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은 북쪽의 한이산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목면산(남산)으로 전달하는 아차산 봉수대가 있던 곳으로, 서울 정도 600주년을 맞이하여 철저한 고증을 거쳐 중랑구 묵동 산46-1번지, 신내동 산 139번지, 상봉동 산 6번지, 중화동 산 1번지 등 연면적 4,060m2에 대해 1993년 11월 3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15호로 지정하였다.


현재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는 1994년 11월 7일 복원한 것이며, 옛날의 아차산 봉수는 함경도와 강원도 방면에서 남산 제1봉수로 연결되는 제1봉수의 말단으로 양주의 한이산에서 봉수를 받아 목멱산(남산) 제1봉수로 전달해 주던 곳이다. 현 봉수대는 다른 곳에서현존하는 봉수대의 형태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등이 기록을 참고하여, 19994년 2월부터 복원 작업에 착수 동년 11월 7일 상부 연대 11.62m, 연조 1기의 규모로 복원하였다.


봉수란 봉(횃불)과 화(연기)로 국경의 긴급한 소식을 중앙이나 국경의 가지에 전하던 군사통신 방법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 삼국시대 이전부터 봉수제가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난 본격적인 국가제도로 확립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의 봉수제를 이어받아 세종 때에는 좀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봉수제가 확립되어 전국적인 봉수망이 정비되었으나 1894년(고종31년)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봉수는 대개 수십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후방의 요지가 되는 산꼭대기에 연대, 즉 봉수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햇불, 낮에는 연기로써 소식을 전하고 우중이나 안개.구름이 덮여서 연기나 불로 연락이 불가능할 때에는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알리도록 하였다. 한편 봉화산 정상에는 산신각이 세워져 있다. 이 산신각은 신내동, 중화동, 상봉동 3개 동의 주민들이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것으로 설립년도는 약 400년 전으로 추측하고 있다. 건물은 처음에 초가단칸이었으나 광무4년(1900)에 기와 단청으로 개축되었다. 신당 규모는 건평이 5~6평 정도로 신당 주위는 철망을 둘러 외인의 범접을 금하고 신당내에는 고깔을 머리에 쓰고 옷을 입은 산신할머니 소상이 모셔져 있었으나, 1992년 7월 27일 밤에 일어난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신내동 거주 최광훈, 윤경용씨 등이 주축이 되어 여러 주민들의 힘으로 1992년 9월 22일 재건립 착공하여 1992년 11월 30일 현재의 붉은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새 건물이 들어섰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무속신앙이 성하여 도당이나 부군당을 가지에 세워 놓고 부락제와 산신제를 지냄으로써 주민들의 화합과 화애를 도모하고 부락의 질병, 재앙을 퇴치하여 안녕을 추구해 왔다. 이에 부락마다 수호신이 있었고 신과 인간의 중개자라고 할 수 있는 무당은 의식에 따라 연전성(演戰性)이 짙은 가무로 흥겹게 축제를 이끌어 갔다.


이 기원은 부족국가시대부터 행해진 것으로 일월성신이나 산천의 기괴한 암성이나 큰 고목등에 곡물과 희생을 바쳐 재화의 예방, 안심과 환희의 생활을 기구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 것이 무속신앙의 발생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자에에 대한 자연숭배사상이 있었고 자연의 변화는 신의 노여움으로 간주하여 축제의식을 벌이는 것으로 변모되어 일정한 시기와 날짜를 정해 연중행사로 되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농업국가로서 산지가 많고 수목이 울창하여 산짐승이 많았지만 그 중 호랑이의 출몰은 주민들의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이 곳 봉화산에서 매년 음력 6월1 일 산신굿을 지내는 것도 일련의 관계가 있다고 본다. 보통 호랑이를 산군이라고 칭하여 산군에게 제사지내는데 제삿날은 매년 좋은 날을 잡고 제사 비용을 추렴해서 고기와 술 등을 마련하여 모든 집에서 무당으로 하여금 북을 치고춤을 추게 했다. 만약 제사에 바친 음식 등이 부정하면 그날 밤 호랑이가 내려와서 개를 물어간다고 한다. 대부분 산신당에 호랑이를 모시는 것은 산신을 상징하며 신상으로는 유명한 장군 이든가 훌륭한 위인이나 그 마을의 개척자를 모셨다. 보통 민각 촌락에서는 산신제를 천제(天祭)라고 했으며 지역에 따라 다르지마 1월 또는 10월에 제사를 모셨다. 그 의식은 진산(鎭山) 위에 신당을 짓거나 사람 눈에 잘 뜨이는 나무 밑을 가려서 신단을 만들고 왼 새끼줄을 두른 뒤 새끼줄 사이사이에 종이끈을 드리운다. 이즐운 '금줄'이라 하며 제주는 목욕 재계하고 며칠간 정성을 들인 뒤에야 음식과 예주(醴酒)를 마련하게 된다. 제사의식에 따라 축문이 끝나면 마을사람의 성명을 일일이 불러 산신에 고하고 호명할 때마다 백지 한 장을 불태우는데 소지가 올라가면 길하고 땅에 붙어서 올라가지 않는 것은 흉하다고 한다. 만약 마을에 전염병이 돌거나 그밖에 재해가 있으면 제사 때 불행한 일이 끼어 있었거나 혹은 정성이 부족한 탓으로 생각하여 다시 별제를 행하고 치제했다. 봉화산의 대동굿은 음력 3월 1일에 날을 받아 정하지만 대개 3월 3일 삼짇날이 된다. 전에는중화동, 상봉동, 신내동 등에 함께 모여 대동굿을 주최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신내동 단독으로 대동굿을 하며, 그 다음해에 상봉동, 중화동이 공동으로 대동굿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소요되는 경비는 토박이 주민들이 주로 염출하여 조달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신당내 마당에 정화수를 큰 물동이에 가득 떠 놓고 그 위에 희 천을 씌운 다음 두 사람이 맞잡고 있으면 무녀가 그 위에 올라서서 가락에 맞춰 회무하면서 강신을 한다. 그리고 나서 만신 앞에 당지기 등이 두 손 모아 빌면 만신은 공수를 준다. 오후에는 신당 밑의 넓은 공터에서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제사를 올리고 굿판을 벌인다.


공터에 차일을 치고 병풍을 세워 놓은 앞에 제사상을 차려 놓는다. 이를 보기 위해 마을 주민들과 인근의 구경꾼들이 수백명씩 운집하지만 봉하산 대동굿은 약식이라 할 수 있다. 즉 큰 굿은 이틀 걸려 열두거리를 하게 되는데 이곳 굿은 열두 거리를 하루에 마친다. 봉화산 대동굿의 의식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터대감놀이

2)부정굿

3) 봉화불사할머니굿

4)조상굿

5)대감놀이

6)제석거리

7)서낭놀이

8)산할머니

9)용궁놀이

10)거리대감

11)신장(神將)놀이

12)뒷전(後錢)

그리고 매년 음력 6월 1일에는 봉화산 산신제가 있다.

신내동, 중화동, 상봉동 3개 동이 공동으로 지내게 되며 이 때 제물로는 소를 바친다. 즉 소를 이곳까지 끌고 와서 잡은 다음 쇠머리등을 삶아 놓고 산신굿을 벌인다. 봉화산의 주요 수종은 소나무이며 기슭에는 먹골배로 유명한 배나무 밭이 조성되어 있다. 먹골배는 배의 품종명이 아니라 단지 먹골이라는 지역엣 생산되는 배를 나타낸다. 실제로 먹골배의 품종은 수분함량이 많고 '신고'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먹골배라는 명칭은 먹골배를 재배하는 농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먹골배의 달고 맛있는 배맛에 이끌린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부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먹골배는 1930년대에 이 곳 봉화산 기슭에서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사과나무를 심었으나 실패하고 대신 배나무를 심었는데 당시에는 봉화산 기슭 동일로 동쪽 일대가 배밭이었다. 먹골배가 달고 유달리 수분이 많으며 맛잇는 이유는 이곳의 토질이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 토양으로 배나무 생육에 알맞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 때에 성동구 살곶이에 있었던 木馬場에서 나오는 두엄을 마차로 실어다 많은 시비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봉화산의 서쪽인 '먹골' 지역에서 재배되었으나 같은 토질인 봉화산 기슭 전체로 확산되어 나아가 봉화산 기슭 동쪽에 있는 신내동, 남쪽에 있는 중화동, 상봉동 일대 전체가 먹골배 밭이 형성되었다. 그 뒤로 먹골배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재배 면적은 인근 태릉 주변과 멀리는 구리시까지 확산되었다.

집성촌 또는 동족촌(同族村)이라 함은 혈연관계가 있는 같은 성씨의 가호들이 모여서 이룬 마을을 말한다.


중랑구에도 의령남씨(宜寧南氏)), 경주임씨(慶州林氏), 전주이씨(全州李氏)등의 집성촌이 있으나, 망우동 '양원리(養源里)'의 동래정씨는 서울시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다. 양원리는 중앙선 철로 북쪽 너머 송곡여자중.고등학교 뒤쪽에 있는 마을로 동래 정씨 일가가 600여년 전부터 17대에 걸쳐 모여 살고 있는 집성마을이다. 중랑구 망우1동 277번지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이 마을은 1995년 중랑구청에서 실시한 '중량구 문화유적 지표 조사'시 조사 용역을 맡은 서울학연구소(책임연구원 최종현)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지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고려말 조서초의 문신인 정구(鄭矩 1350~1418)가 정착한 이후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는 서울시 최고의 집성촌 마을로 밝혀졌다. 정구는 고려말 조선초의 왕조가 바뀌는 정치적 혼동 속에서 고려완종에 대한 지조를 지키고자 조선왕조의 도읍인 한성에 들어오지 않고 경기도 양주의 송산에 머물면서 중국 은나라가 망할 때 지조를 지킨 기자(箕子), 비간(比干), 미자(微子)의 삼인(三仁)과 고려의 두문동(杜門洞) 현인과 행동을 같이 하였고, 태조. 태종과의 우정을 지켜 출사하여 시대 상황을 포용하는 면모를 보여준 인물이다.


동래정씨 마을 어귀에는 "정구가 고려말 이후 이주한 이래 동래정씨 동성(同姓)이 모여서 이루어진 서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집성촌"이란 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표석 뒤로는 비닐하우스를 비롯한 밭작물이 재배되고 있으며 그 양쪽으로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집집마다에는 '鄭00'라는 문패가 달려 있어 한눈에도 일가 친척간이 모여 사는 집성촌임을 알 수 있다. 1995년 봄 이곳이 서울에는 현존하는 최고의 집성 마을임이 알려지자, 방송 3사를 비록한 일간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특히KBS '6시 내고향'을 통해 집성촌의 삶의 모습이 공중파를 통해 자세히 알려졌다. 특히나 이 마을에는 망우리고개의 명칭이 생기게 된 전설과 관계 있는 우물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가 지금의 동구릉에 사후의 명당 자리인 건원릉을 정하고 돌아오는 옛 망우리고개를 넘다가 갈증이 생겨 이곳 우물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어찌나 좋은지 이 샘물을 양원수(養源水)라고 이름을 붙여 준 뒤부터 마을 이름을 양원리라고 하였다 한다. 현재의 양원리 우물은 이 마을의 밭 가운데 남아 있기는 하지마, 농약의 사용과 주택이 늘어나며서 수질이 오염되어 식수로는 사용할수 없으며, 당시처럼 물이 샘솟지도 않는다. 태조 이후 현재의 망우리고개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이곳 양원리를 통해 동구릉으로 가는 왕들의 능행로가 있었으나 일제때 경북궁과 동구릉을 이어주는 능행로의 맥을 끊기 위해 중앙선을 만들었다는 설이 전하기도 한다.


정절공(靖節公) 정구가 정착한 이후 이 마을에는 정존겸(鄭存謙), 정연지(鄭彦智) 등 수많은 정승판서와 효자로 이름난 정세희(鄭世禧)가 배출되었다. 태조가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분토산에 정씨 일가의 묘역이 있는데, 처음에 이곳에 정구의 묘가 있었으나 후일 의정부 송산(松山) 기슭 어용동(魚龍洞)으로 이장되었고 현재는 정구의 부인 묘소와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을 지낸 정응(鄭膺,1490~1522), 정건(鄭騫, 1515~1545), 정숙하(鄭淑夏, 1541~1599), 정습(鄭習, 1652~1727), 정세희(鄭世禧, 1628~1676)등의 묘지가 있다. 또한 지난 1995년 '중랑구 문화유적지료 조사' 중 발견되 망우동지는 권희(權禧, 1547~1624), 한성판윤을 지낸 권반(權盼, 1564~?)이 1621년 편찬한 '훈도방(薰陶坊) 주자동지(鑄字洞誌)' 이후 처음 발견된 종지로 당시 사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망우동지는 정구의 후손인 정일섭(鄭一燮)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기증 절차를 거쳐 현재는 서울 시립방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동지는 편저자 미상의 필사본으로 광곽(匡廓)은 28.5X12cm이며 2권(상,하) 1책으로 편찬되어 있다. 편저자는 알수 없으나, 상편의 말미 "洞( )時座目後" 편에 남치관(南致寬)의 나이 39세인 기묘년(1759년)에 기록한 것과 1760년에 편찬되었다고 전제한다면 남치관이 편저자일 가능성이 있다. 편찬시기는 하편 말미에 "( )楨三( )"이라 기록되어 있어, 조선 영조 36년(1760년)에 편찬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 "을 숭정기원(1628년) 후 3년째인 경진년으로 단정지어 1630년으로 추정하거나, 숭정기간(1628~1644년) 후 세번째 경진년으로 보아 1820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 을 숭정기원(1628년) 후 세 번째 경진년인 1760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는

첫번째 이유는 '망우동지(忘憂洞誌)' 상편 선생안서(先生案序) 말미에 ' '에 남치관이 기록한다는 것과 선생안서의 앞뒤 내용으로 미루어 남치관의 나이 31세 [상편의 洞楔時座目에 경자년(1720년)에 출생한다는 기록이 있음]에 쓴 것으로 "( )三辛未"에 남치관이 기록ㄷ한다는 것과 선생안서의 앞뒤 내용으로 미루어 남치관의 나이 31세 [상편의 洞楔時座目에 경자년(1720년)에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음]에 쓴 것으로 "( )楨三( )"이 숭정기원 후 세번째 신미년인 1751년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망우동지'상편 구동향약서(舊洞嚮約序) 말미에 "紀元之五十 一年 ( )干年"으로 명확히 기록한 것을 보면 " "을 " "의 오기로 판단 숭정기원(1628년)후 3년째인 경진년(1630)으로 보기는 더욱 어렵다.

셋째는 '망우동지' 상편 형승(形勝)편에 "육릉 즉 건원릉, 현릉, 목릉, 휘릉, 숭릉, 혜릉이 있다."라고 기록디어 있어 경종의 비 단의왕후가 1718년 사망하여 동년 4월 19일 혜릉으로 모셔졌고, 영조가 17776년 7월 27일 칠릉인 원릉으로 모셔졌으니 편찬년도는 1776년 7월 이전으로 보여진다. 또한 상편 능묘(陵墓) 편에 "강릉. 태릉과 의릉이 있어 모두 그릉이다." 한것으로 보면, 의릉에 경종이 1724년에 모셔졌으니 1724년에는 1776년 7월 사이에 편찬된 것이 확연해 진다.

넷째는 상편 신구동선생안(新舊洞先生案)에 기록된 인물 중 맨 끝 정태일(鄭泰一)의 사망년도가 무인년(1758년)으로 상.하편을 막론하여 가장 늦은 시기로 1758년 이전에 편찬된 것이 아님은 자명하고, 상편의 동명의 유래, 현승, 능묘, 마을, 고적, 풍속, 토산물, 동계의 유래, 동리 규칙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자료를 모아 편성한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망우동지'의 표지를 넘기면 망우리 전체의 지세를 볼 수 있는 망우총도와 의령남씨의 묘역을 표시한 의령남씨산국내도, 동래정씨의 묘역을 표시한 동래정씨산국내도, 평산신씨 산국내도가 있으며, 망우동지의 목록과 범례가 실려 있다.


'망우동지' 상편에는 동명의 유래, 현승, 능묘, 마을, 고적, 풍속, 토산물, 동계의 유래, 동리 규칙과 망우리 지역에 산재해 있던 지금의 별장격인 묵우당(默愚堂), 사오당(四五堂), 남간(南澗)의 신도비 문구, 정구(鄭矩)의 행적, 신말평(申末平)의 묘비 문고, 김인손(金麟孫)의 신도비 문구, 신상(申상)의 신도비 문구, 정응(鄭응)의 묘비 문구, 정건(鄭건)의 묘비 문구, 정숙하(鄭淑夏)의 행적, 남정구(南定國)의 묘비 문구, 신경진(申景진)의 신도비 문구, 남대원(南大源)의 행적, 신여정(申汝挺)의 묘비 문구, 남종백(南宗伯)의 묘비 문구, 유광문(柳光門)의 묘비문구, 신여철(申汝哲)의 묘비 문구, 정습(鄭習)의 묘비 문구, 정세희(鄭世禧)의 묘비 문구, 신옥(申沃)의 행적, 남오(南오)의 행적 등 19명의 신도비.묘비 문구와 행적을 글로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상편의 동명원위(洞名原委)와 형승(形勝)편에 보면 당시 망우리의 규모와 경계를 가름할 수 있고, "봉화산 봉화대는 옛날에는 아차산 뒤에 있었으나 강릉과 태릉에서 바라다 보이므로 이 봉우리로 옮겼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 봉화산에 위치한 봉수대의 건립시기를 강릉(1567년)과 태릉(1565년) 안장 이후에서 임진왜란(1592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또한 월릉교(月陵橋) 근처에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송계교(석교)의 위치와 규모가 기록되어 있어 송계교의 실체를 증명해 주고 있어 중랑구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망우동지'를 편찬하고 필사본 몇권을 의령남씨, 평산신씨, 동래정씨 일가가 나누어 보관하였을 것으로 짐작하며, 한 마을의 동지로서는 조선시대 부지(府誌)나 읍지(邑誌)를 능가할 만큼 풍부한 내요으로 편찬 되었다. 따라서 '망우동지'는 조선시대 향토사(지방사), 즉 향촌사회 연구, 인물사(씨족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나 아직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현재 동래정씨 집성촌인 양원리에는 30여 호가 거주하며 비닐하우스 작물재배와 밭농사를 짓고 있으나, 지하철 6호선 개통과 함께 밭 일부가 차량기지로 사용되어 지난날의 밭농사 짓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이기주의와 핵가족화로 잊었던 친족간의 정과 흙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마을이 아직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앞으로 집성촌으로 메말라 가는 시대의 샘물이 되어 주기를 기원해 본다.

능말의 경주임씨 집성촌은 동래정씨 마을인 양원리 건너편, 구릉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부도시고속화도로를 경계로 하고 있는 집성마을이다.


중랑구 신내1동 102번지 일대에 20여호가 거주하며 높이 177.9m의 구릉산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능후동과 능내동으로 부르는데 흔히 능마을, 혹은 능말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구릉산 북쪽에 있는 동구릉에서 보면 능 뒤에 해당되기도 하고, 뒤쪽은 안쪽이라는 뜻과도 상통하기 때문에 불려진 동명이다. 동구릉에는 조선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하여 9릉 17위의 왕과 왕비의 능이 있어, 역대 왕의 능행이 끊임없이 이어진데다가 왕릉 주변에 산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긍지로 '능말 경주임씨가 진사보다 낫다'고 하는 말까지 생겨났는데 진사시에 합격해서 비록 진사가 되었다고 하지만 성균관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응시해서 급제해야만 제대로 벼슬길에 나갈 수 있고 대개는 참봉, 훈도, 오위장과 같은 종 9품직에 제수되어 임금의 그림자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능말에 경주 임씨 집성촌이 형성된 것은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와서부터이며, 이들은 소작농과 능역의 대가로 구릉산의 낙엽을 모아 팔아서 생업의 기반을 삼았다.


능역을 하던 해주최씨, 경주임씨, 순흥안씨 가운데 경주임씨가 10대 이상을 거주하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신내1종 105번지 임종길씨댁과 98번지 임수기씨댁은 110년에서 180여년 된 전통가옥으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민속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집성촌 주변에는 배밭과 파 등 밭작물 재배로 농촌의 풍광을 즐길 수 있으며 특히 배꽃 피는 5월이면 한폭의 산수화를 연출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이곳에 정착하면서 선조를 모신 묘지가 신내1동 산 40번지 일대에 공동묘지 형태로 있는데, 최근 199년 4월에 세운 임동옥 부부 묘어ㅢ 비석을 제외하고는 상석과 작은 문석 몇 기만이 있을 뿐 비석이 없는 묘가 300여 기가 자리잡고 있다. 집성촌을 감싸안고 있는 구릉산은 검암산으로 불렸는데, 구릉산으로 명명된 것은 문조와 신정익황후의 수릉이 1855년 용마봉 아래에서 동구릉으로 봉안된 직후부터였다.


구릉산에서는 석기 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오석, 옥수석기, 흑도 등은 빼어난 작품으로 손꼽는다. 집성촌에서 구릉산 너머 동구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이 고개를 박수고개라 하고 있다. 박수고개에는 서낭당이 있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무사하길 비는 제사를 반드시 지내야만 했다. 만일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냥 고개를 넘었을때는 꼭 뒤탈이 있었다. 제사를 지내게 된 까닭은 옛날 해질녁에 급히 이 고개를 넘여야 하는 한 나무꾼에서부터 시작된다. 진종일 비가 내려 땅이 질퍽거리는데다가 겨우 개인 비 끝이라 해도 저녁 물안개로 사방을 분간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나무꾼은 구릉산에서 숱하게 많은 나무를 하면서도 한 번도 산신께 제사를 드린 적이 없어 산신의 미움을 받고 있는 터였다. 얼마 전에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를 몰래 찍어 내어 판 적이 있는 그는 어쩐지 운명의 신이 이번 만큼은 자기를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을 가졌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무를 하면서 때로는 자기가 먹을 참외 일부를 산짐승이 먹도록 나누어주는 일도 했으므로 실낱같은 희망은 공양보시를 했다는데 있었다.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마침내 고개를 넘기로 했는데 뭔가 큼직한 물체가 눈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놀라서 물러서는데 그 물체는 나무꾼에게 "얼마 전 당신이 찍어 넘어뜨린 소나무에 살던 귀신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집을 없애버리고 말았으니 난 오갈데가 없어졌다. 이제 당신 몸을 내 집으로 대신 삼아야겠다."며 따라오는 것이었다. 나무꾼은 도끼를 휘두르며 정신없이 도망을 쳤으나 번번이 발목이 잡힐 뿐이었다. 그 순간 가까운 곳에서 커다란 박수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두 사람이 치는 소리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치는 우뢰와 같은 소리였다. 이 바람에 소나무 귀신은 물러나고 말았는데 귀신에게 잡혔던 나무꾼은 잃었던 정신을 차리고 박수소리를 다시 한번 들어보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박수소리가 아니라 산새들이 짹짹거리며 지저귀는 소리와 산토끼가 나무숲을 다니며 가랑잎을 밟는 소리였다.

그 동안 나무꾼이 밥을 먹을 때마다 한알 두알씩 밥알을 얻어먹던 짐승들이 나무꾼이 위기에 처하자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일부러 내는 소리였다. 정신을 차린 나무꾼은 산짐승 덕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이때부터 고개를 넘을 때는 박수를 치면서 넘게 되자 이 고개를 박수고개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편, 박수고개를 넘기 전 왼쪽 언덕에 묘가 하나 있는데, 문석 2기, 상석 1기 향로석 1기, 비석 2기로 구성된 단분 합장묘이다. 이 묘는 1453년 계유정난에 참여했던 환관 "전균" 부부의 묘임을 알 수 있다. 전균은 강화 출신으로 조선왕조 세종에서 세조까지 4대 왕조를 모신 내시로서, 세종때부터 왕명의 출납을 맡기 시작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아 문종 2년 3월에는 전균을 가선대부로 삼으면서 "전균은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고 재간이 있으므로 세종은 그에게 문방의 일을 맡도록 하여 글자를 알지 못하면서도 왕명을 출납할 적에 한 글자도 틀리지 않으니 이로써 가선대부로 삼는다."는 기록이 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왕의 신임을 받기 시작하면서, 1453년에는 수양대군, 한명회, 성삼문, 신숙주를 도와 황보인, 김종서, 이양 등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게 되자, 단종 1년에 권준, 신숙주, 환관 엄자치 등과 함께 정난 2등공신으로 판내시부사로 승급되고 강천군으로 봉군되었으나, 단종 1년 1월에 성삼문 등의 상소로 봉군한 것을 취소하였다. 세조1년에는 정인지 등과 함께 수충경절 좌익공신이라 칭하고 50결의 난신전과 집, 전토와 노비를 하사 받고, 세조 2년에는 난신에 연좌된 성맹첨의 아내 현비, 최사우의 첩 옥금, 진도에 영속한 계집종 소사와 조완규의 첩의 딸 옥금을 받았다. 세조4년에 전균을 좌익 2등 공신으로 책훈하는 교서에 "모의에 협조하고 도와서 남다른 공훈을 능히 이루었으니, 공에게 보답하여 상을 주는 것은 예로부터 상전이 있는데, 이 것은 오로지 공의에서 나오는 것이요, 사사로운 은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건데, 그대는 총명과 지혜가 보통사람과 달랐고, 부지런하고 민첨하기가 비할바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황고를 만나서 내정을 가까이 모시니, 왕명을 출납하는 의무를 맡도록 하였으나 아무런 착오나 실수가 없었다. 지난번 유안이 화를 꾸며 한나라 조정이 장차 기울어지려 하였을 때와 같은 때에 그대의 시기에 대응하는 공에 힘입어 저들의 하늘까지 차서 넘치려던 죄악을 섬멸하였다. 공훈이 이미 크니 권애가 실로 많은 것이다. 비록 큰 권간이 제거되었다고 하나, 아직도 그 여파가 있으나 전의 감정을 풀려고 꾀하고 장차 과궁을 위태롭게 하려 하여 무뢰한 무리들과 연결하여 화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있었다. 다행히 천명이 참람하지 아니하여 죄인들이 스스로 복주하기에 이르러, 드디어 광니으로 하여금 금일이 있게 하였다. 이것이 비록 황천이 도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그대들의 보조한 때문이다. 이렇듯 도와 준 공적이 드러났으니, 마땅히 포숭하는 전례를 베풀러야 하겠다 이에 좌익 2등공신에 책훈하고, 그 부모와 처에게 봉작하며, 유사가 영세에 미치게 한다. 이어서 전지 1백결과 노비10구, 백은 25냥쭝, 표리 1단, 내구마 1필을 내려주니, 리르거든 수령하라. 아아! 그대는 나의 뜻을 숭상하여 더욱 충성과 정절을 돈독히 하여 길이 부귀를 보전하라" 하였다.


세종 9년 2월에는 전균을 파직하였으나 같은 해 7월에 복직시켰고, 11년 7월에는 다시 파직하였으며, 12년 1월에는 관제 개편과 함께 전균을 승정대부 하음군으로 삼았으나, 성종1년(1470년) 향년 62세로 생을 마쳤다. 전균은 환관으로서 공신이 되고 봉군과 함께 작위가 1품에 오른 조선왕조 역사상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형의 아들인 전구복을 양자로 삼아 문음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당상관까지 지내는 영광을 얻었으며, 연산 9년 6월의 연산군 일기에 "죽은 환관 전균의 노비 중 1백 9명은 내수사에 주고 나머지 20명은 본 주인에게 주라"는 기록으로 보아 노비가 1백30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부와 권세를 누렸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전균의 비석 옆으로 부인의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은 성종 7년(1476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전균의 모의 상석 옆면에는 "1989년 월 일 입"이라 새겨져 있어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상석과 향로석, 북석을 새로 만들어 세운 듯 싶으며, 묘역이 잘 정돈되어 있어 후손들의 보살핌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비록 환관이지만 조선 시대의 역사적 인물로 재조명하고 연구하는 것이 올바른 사관을 정립하는 것이라 생각되며, 중랑의 문화유적지로 부상하기를 기대해 본다.